회사 과제차 MP3를 찾다 플래시 작업에 사용하게된 '리듬앤 폴리스'에 심취해..

예전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본다.

"완간경찰서 형사과 강력계 형사인 아와시마 ㅤ슌사쿠(오다 유지)와 절도계 온다 스미레(후카츠 에리)는 중앙과 지방을 가르는 철저하게 이원화된 경찰 조직의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사건 해결에 매달리지만 경찰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생활한다."

그게 야금야금 보다가 보니 어느새 모두 보게 된 11부작 [춤추는 대수사선 ([踊る大捜査線, 1997)] 텔레비전 시리즈와 스페셜 1, 2, 3 및 영화 첫 편을 아우르는 줄거리같지 않은 줄거리이다. 물론 두 사람 주변에는 개성 만점인 인물들이 꽤 여럿 있다. 정년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늙은 형사 와쿠(이카리야 초스케)는 오래 전 자신의 조수였던 젊은 형사의 살해사건을 해결하고자 (아픈 허리를 부여잡은 채) 고군분투한다. 거기에 국가고급 경찰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출세길을 보장받은 젊지만 곧 상관이 될 공부벌레와 만년 계장이 등장하고, 위로는 늘 무능하고 안일한 삼총사 서장, 부서장 그리고 형사과장이 버티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방경찰을 깔보며 출세가도를 달리다 어느새 완간 경찰서 일선 경찰들을 마음 속으로 인정하는 중앙경찰 고위 관료 무로이(야나기바 토시로)도 한 몫 한다.

굿럭, 롱 베케이션, 히어로, 동경 러브스토리, 카바치타레, 너의 손이 속삭이고 있, 고쿠센 1기, 2기, 세계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전차남등등, 꽤 여러 일본 드라마를 시청했지만, 볼 때마다 점점 굳어지는 생각은 일본 드라마가 얼마나 심하게 감정과잉을 개인적인 섬세함으로 돌리려 애쓰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거의 구별해내기 힘든 삶 속의 감정을 과장한다. 과장을 통해서만 분별해낼 수 있을만큼 섬세한 (아니면 십중팔구 별 차이가 없는) 색깔을 구별해내려 발버둥친다. 이렇게 구별내 낸 (또는 구별해 냈다고 믿는) 감정을 하이쿠(俳句)를 읊듯이 길게 끈다. 한국 관객이라면 하품이 쏟아질만큼 긴 시간 동안 끌어간다. 한 박자, 두 박자, 세 박자로도 채우기 힘들만큼 긴 시간을 채운다.

그게 섬세한 감정이 아니라면 전혀 섬세하지 않은 감정은 공들여 고민할 필요가 더이상 없다. 사근사근 속삭이듯 봄 바람에 휘날리는 사쿠라와 사랑 사이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은 어느새 "빠가"를 심술궂게 (아니 험악하게) 외치는 야쿠자 말투로 변한다. 아들이 부모에게, 직장 신입사원이 상사에게, 길가던 청년이 노인에게 퍼붓는 악담과 항의와 분노는 이제 섬세하지 않아서 구별할 필요가 사라진 감정을 단 한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제적인 자세가 된다.

이렇게 섬세한 감정과 묵직한 감정을 일찌감치 가른다면 이제 작가와 배우와 감독에게 남은 도전은 다시 섬세함으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시작부터 제한을 둔 표현력은 더 빨리 그리고 쉽게 클리셰로 굳어지기 십상이다. 표현 그 자체가 클리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표현하는 양식은 어느새 클리셰가 된다.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상대에게 불쑥 수수께끼같은 말을 던진다. (십중팔구 극히 심한 생략형 문장을 쓴다.) 상대는 되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그러면 설명이 뒤따른다. "사랑은...", "인생은...", "음악은...", "경찰이란 것은...". 상대는 고개를 끄덕인다. "쏘네", "쏘까", "쏘까네", "쏘데스까". 그렇게 두 사람은 인생에서 특히 섬세한 뭔가를 구별해내는데 다시 한 번 성공한다. 또는 성공했다고 자축한다.

굵고 격렬하고 다급하고 위험한 감정을 극도로 회피하려는 이런 자세는 마침내 철저하게 개인적인 감상으로 극중 인물들을 몰아 넣는다. 사회적이고 집단적이며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약소꾸"는 늘 잊혀지고 위반 당하고 무시되지만 그래도 그들은 끊임없이 "내가 좀 더 성실하면" 뭔가 나아지지 않을까 희망한다. 그런 희망이 30-40년 동안 서서히 무너진 뒤라면 "옳은 일을 하고 싶으면 훌륭한 사람이 되"면 된다. 그런 훈계가 마땅치 않아 중구난방 돈키호테처럼 뛰어 다니는 젊은 형사는 위로부터 징하게 이지메를 당하고 그가 총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 모두들 거리에 나와 거수경례를 한다. 과거에도 그랬다. 내전으로 민생이 곤궁해지다 못해 피폐함이 하늘에 이른 뒤 어쩔 수 없이 일으킨 민란 뒤에는 늘 주모자들의 집단 할복이 있었다. 그리고 (물론) 세상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다음번 민란이 터질 때까지.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할복할 때까지.

한국 드라마는 소위 "감정선"을 이토록 길게 끌어갈 때 불안해 한다. 감정을 위한 감정은 심한 자아도취로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관객 전체가, 사회 전체가, 집단 전체가 감정의 공동선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최대공약수를 찾으려 (또는 시청률을 끌어 올리려) 합의된 감정과 그런 미묘한 감정에의 도취에 치중하다가는 쫄딱 망하게 된다. 극중 인물들의 감정은 운명처럼 운명적인 필연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래서 세대를 뛰어 넘는 은원관계와 핏줄로 얽힌 사랑과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날 비극이 등장한다. 감정을 위한, 감정에 취하는 자아도취만을 위한 감정은 이제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내재적인 동인이 될 수 없다.

이는 아니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섬세한 감정선을 "터치"하지 않는다면 그건 모두 [피구왕 통키]나 [테니스의 왕자]가 된다. 감정이 아닌 감동을 위해서 여러 장애인 이야기가 등장하고, 감정도 감동도 해프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때 [고쿠센]처럼 과장된 연기가 등장한다. 모두가 일정하게 조율된 감정선을 따라 가기를 (제작사는) 갈구하기에 [맨해튼 러브 스토리]이나 [카바치타레]에서처럼 주인공(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헉헉대며 눈물 흘린다.

이런 미묘한 감정선을 향한 집착은 기술적인 섬세함으로 곧 연결된다. 묘사하는 직업군에서 일본 드라마가 한국 드라마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도, 에피소드에 활용되는 사건들의 사실성이 훨씬 돋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심지어 세계를 휩쓰는 아니메의 사실적인 충실함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시적으로 충실한 드라마 속의 세계는 끝내 거시적인 현실 또는 세계의 진정성과 조우하는데 자주 실패한다. [히어로] 속의 주인공 검사는 세상에 맞써 싸우지만 좌천되고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춤추는 대수사선] 속의 캐리어조 고급관료 무로이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며 현장 요원들의 고충을 중앙에 전달하고자 헛된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너의 손이 속삭이고 있어]의 장애인 가족은 세대를 넘어서며 같은 고민과 같은 서러움에 눈물지을 것이다.

일본 드라마는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세상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 세상 안에 사는 인물들조차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소시민적으로 노력할 뿐이다. 노력하고 또 하면 뭔가 달라지겠지 소망하면서 그러나 한편으로는 결코 그러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면서도 노력한다. 한국 드라마라면 차라리 죽고 만다. 비리를 폭로하고, 허접한 지방대학 출신이 꿈을 (물론 사랑도) 이루며, 악인은 (한시적일 것이지만) 철장 신세가 된다. 악인은 허접하게 작성한 음모의 시나리오에 치어 스스로 무너진다. 아니면 차라리 병에 걸려 죽는다. 아니면 이제 형제, 자매, 남매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겠지만 적어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변한다. 내가 변할 운명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물론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드라마가 세상을 바꾸는 주된 도구인 적이 있었던가? 그걸 제작사도 알고 시청자도 안다. 그걸 몰라서 시청자가 바보처럼 바보 상자 앞에 앉는다는 생각은 얼마나 바보같으냐. 결국 드라마는 세상을 투영할 뿐이다. 세상 속에 파묻힌 뭔가를 다시 찾아내거나 되새김하거나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드라마를 본다. 세상을 공명하되 흔들림 없는 기이하고 모순된 환상 때문에 드라마를 본다.

결국 일본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공명하는 것일까? 그래서 아마도 한국 관객은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 그다지 열광하지 않는 것일까? 이미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만큼 길게 늘어지는 그들의 아슬아슬한 심리묘사가 드디어 황당하고 비사실적이고 지루하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백혈병에 걸린 애인이나 이복 동생과 엮인 삼각 관계가 차라리 덜 비사실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진을 쪽 뺄 정도로 늘어진 감정선이 인공미를 획득하는 순간 완전히 상실했던 또 다른 필연성을 매우 조잡한 형태로나마 다시 맛보게 해 주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The Band of Brothers]나[ER]나 [X-File]이나 [Taken]나 [CSI]와 같은미국 드라마들과 같은 탁월한 드라마가 왜 한국이나 일본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냐? 드라마 왕국이라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왜 문화와 언어와 국경을 뛰어넘는 걸작이 나오지 않는 것이냐?

우선 떠오르는 답변은 "나오지 않으면 어떠냐!"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끼리 즐겁게 노는데 수출품이 아니라고 즐거움이 덜한 것은 분명 아니다. [대장금]이나 [겨울연가]같이 잘 팔리는 드라마 정도면 '다이죠부데스' 아닌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시력의 차이가 아닐까? 감정선에 집착하거나 운명의 힘을 나의 힘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모두 세상을 너무 어렵게 보거나 만만하게 보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세상은 그렇게 참고 견뎌내면서 자기 할 일만 하다보면 살만한 곳으로 바뀌는 장소도 아니거니와 고상한 질병이나 가족애나 우정 따위로 구원받을 수 있을만큼 순수한 곳도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어떻게 더럽고 추악하고 모순된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를, 과연 어디에 어떤 모순이 어떤 이들이게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를 진지하게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진정성을 획득한 드라마가 나오는 것일게다.

[고개숙인 남자]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와 같은 우리 드라마가 다시 보고 싶다.

하지만 앞으로 결코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화가나고, 슬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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